3.8 여성대회 온라인 이벤트_페미니즘을 만난 경험 쓰기
- 주제 : <페미니즘을 만난 경험 쓰기>
- 기간 : 2025년 2월 27일 (목) ~ 3월 8일 (토)
- 참가자 : 총 9명
- 수상 : 감동상_쏭쏭, 권성혜 / 아차상_문장혜
■ 김성애
주부로서 경제력이 없었던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 넷을 키우면서도 나도 모르게 돈 벌어 오는 남편의 눈치를 보면서 살았다.
남편 또한 밖에서 돈 번다고, 힘들었다고 집에 오면 손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남편도 나를 집에서 놀기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 집에 오면 거드름을 피우는것 같았다.
페미니즘을 알고 나의 의식이 점점 깨어나기 시작하면서 나는 남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회도 주부의 노동력을 인정해 주는 분위기가 형성 되면서 남편도 나를 인정하는 쪽으로 의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여성의 가사 노동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페미니즘이 우리 부부를 민주주의로 가게 만든 나의 경험 이야기이다.
모든 것의 시작은 가정이다.
■ 유정화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문화환경 속에서 살아온 나는 “여자는 여자답게, 남자는 남자답게”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나는 내가 얼마가 나답게 살고 있지않은가를 알게 되었고 페미니즘은 나를 급격하게 변화시키지는 않았지만 스며들듯 나의 주변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는 돌봄 역시 나의 당연한 책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것 같다.
나의 주변을 변화시키기는 어렵겠지만 내가 그러했듯 나의 주변인들도 서서히 나로 인해 변화해가리라 생각한다.
■ 김희정
나는 1967년생 현재 나이 59살
그 시대 분위기와는 다르게 가족의 축복 속에서 태어났다 ( 반전!! 나에겐 두 오빠가 있다) 사람들은 내게 외동딸이어서 사랑을 많이 받고 공주처럼 자랐겠다고 말하지만, 나의 10대는 가사노동을 분담하고 오빠의 전담수발러 어느 날,외출후 돌아온 엄마는 밥만 하고 반찬은 해놓지 않았다고 나를 혼내셨다.
내 나이 고작 10살이었다.
그런 차별과 불공정에 혼란과 분노의 시간을 지나 20대가 되었다.
“ 여자가 어디~”, “여자는 안돼”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미약하지만 힘겨운 사적투쟁을 벌이다 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울림에 있다.
결혼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 살고 싶었다] – K (55세)
여성으로 사는 게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힘든 일에서는 배려받았고, 여자라서 관심을 받기도 했다. 남동생보다 더 많은 기회가 있었다. 부모님은 오히려 장녀인 나를 더 신경 써 주었다. 아빠의 사랑도 독차지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페미니즘 운동에 거부감을 가졌다. 싸우는 게 싫었다. 남자와 여자를 갈라놓지 말고, 더 약한 사람들—장애인이나 아이들의 인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여자로 사는 삶에 만족하며,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다 중년을 넘어, 외모가 변하고 ‘아줌마’로 불리기 시작할 무렵, 내가 누려왔던 것들이 절대적인 특권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것들은 ‘젊고 예쁘고 매력적’이라는 암묵적 조건을 갖췄을 때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사회는 중년 여성이 된 나에게 이전과 다른 것을 요구했다. 아무리 바빠도 외모를 가꿔야 했고, 가족이 빛나도록 그림자를 자처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에서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여자다운 사람’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제야 ‘여자로서의 찬사’는 젊음과 순응에 대한 보상이었음을 깨달았다.
세월이 갈수록 페미니즘에 대한 내 생각도 선명해졌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길든 ‘여자’였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여자가 아니라, 인간으로 살라고 나를 다독이며 손을 내밀었다.
이제 나는, 여자와 남자가 아닌 사람으로 사는 세상을 바라며, 더 평등한 세상을 위해 목소리를 낸다.
■ 문장혜
나는 초등학교때 남자아이들보다 키가 컸다. 구슬치기, 딱지치기도 잘했고 메뚜기도 잘 잡았다. 중고등학교는 여학교를 다녀서 편했다. 두발자유, 교복자율이 되자마자 머리를 짧게 자르고 바지를 입었다.
대학생이 되자 여성다워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다. 머리를 기르고 치마를 입었다. 직장을 다니면서는 화장을 하지 않는 것이 흠이 되었다.
동등하게 일하면서 남자직원들보다 월급이 적었다.
결혼을 하면서 시댁의 온갖 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큰며느리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아이를 낳고 양육을 하면서 일도 했다. 아이를 놀이방에 보내고 유치원에 보내고 학교에 보내는 일이 다 내 몫이었다. 남편은 직장에서 승진하며 한창 바쁜 시간을 보냈고, 나는 아이를 위해 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면서 늘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90이신 엄마는 60이 다 되어가는 나에게 여전히 ‘여자는 나이가 먹어도 여자’라는 말씀을 하신다. 남편이 집에 있는데 늦게 나다니지 말라고 하신다. 가정에 충실하라고 하신다.
평생 나의 사고는 남편과 아이를 중심으로 맞춰졌다. 당연하다는 생각이 당연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바뀌고 있다. 이제는 나를 우선으로 결정해야 겠다는 생각, 여자가 아닌 독립된 인격체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패미니즘이라는 말이 어려웠는데 한 인간으로서 나의 길을 찾는 것, 이것이 나의 패미니즘의 시작이 아닐까? 나의 미래는 좀더 나다울 것 같다.
■ 꿈이(최운정) – 나의 출산 이야기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여성으로 주체적인 삶을 살았다는 경험이라고 하니 나에게 유일하게 떠오르는 하나의 기억이 있다. 바로 출산이다. 직장 면접에서 ‘저는 태어나서 제가 가장 잘 한 일이 출산을 했다는 것입니다.’라고 할 정도이니 스스로 꽤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사건인가 보다.
태아의 존재를 알았을 때 우주와 내가 일치되어 만나는 신기한 느낌을 가졌다. 시간이 지나 입덧이 가라앉고 다니게 된 임산부 도서관(그곳은 임산부 출산교실을 도서관으로 명칭했었다.)에서 아기의 출산을 위한 전반적인 내용을 배웠다. 그 곳에서는 임부를 서로 ‘선생님’이라고 불렀는데 엄마가 될 준비를 하는 곳이 아니라 임부인 우리는 이미 엄마이고, 아이의 가장 좋은 첫 번째 선생님은 바로 부모이므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게 된 것이다.
배움이 진행되는 동안 30여년을 살아오며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나의 생각의 관점이 송두리째 다시 정립되고 주체적인 나, 여성이자 엄마인 나, 부모인 나로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했다.
첫 출산인 나는 많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출산은 여성이 주체가 된 말이고 분만은 병원이 주체가 된 말이라 는 것을 알게되었다. ‘출산’이라는 말에 이미 여성이 주체가 된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이렇듯 분만으로서의 출산은 의료진 등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고통스럽게 소리지르며 하늘이 노랗게 변하면 그때서야 치르게 되는 의례행사로 생각되듯이 나도 같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교육이 진행되는 동안 출산은 고통의 의례적 행사가 아닌, 가족의 행복한 축제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더군다나 태어난 아기의 엉덩이를 쳐서 기절할 듯 큰 소리로 울어야 건강한 출산의 신호라고 생각했던 것이 ‘폭력’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움과 충격을 느꼈다.
반면, 아기는 조용하고 평화롭고 편안하게 자궁 속에서 세상밖으로 나와 첫 존재를 알릴 수도 있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조용한 출산 장면을 수 많은 영상으로 접하게 되며 나도 이런 평화로운 출산을 하고싶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수중분만이었다. 당시 뮤지컬가수 최정원씨의 수중분만이 막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었지만 생소했던 출산 방법이기도 했다. 다행히 진료를 다니던 병원은 중소형 병원으로 수중분만이 가능했기에 주저없이 선택을 했다. 수중분만은 무통주사등 그 어떤 의학적 처치 없이 자연 그대로 출산을 해야했기에 출산 방법을 선택한 이후 출산 직전까지 운동을 열심히 했다. 운동은 임산부 요가, 출산용 공 운동, 케겔운동, 각종 체조 등이었다. 운동 외에 가장 집중한 것이 명상이었다. 명상을 위한 멘트는 항상 출산 당일 아침 부터 시작한다. 매일 매일 출산 당일에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세세하게 그림을 그리듯이 상상하여 만나고, 그 상상 속에서 나는 수십차례, 수백차례 내가 준비하고 대처해야하는 상황을 시뮬레이션 하여 경험했다.
출산일이 가까워오고, 마음의 준비는 거의 마친 시점에서 엄마와 출산 전 여유있는 마지막 데이트를 하고싶었다. 엄마와 단둘이 덕수궁에서 하는 미술전을 보러갔다. 지하철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안 자연스럽게 출산 촉진 동작 체조를 더 하게 되었는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평소와 다른 느낌이 있었다. 간헐적 통증이었다. 하지만 놀라거나 긴장하지 않고 조심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차분히 남편에게 전화해서, 명상에서 늘 그랬듯이 ‘이제 아기가 나올 준비가 되었나봐. 놀라지 말고 나는 괜찮으니 천천히 퇴근해서 집으로 와줘~’ 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고 정말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명상에서 상상했던 그대로 이루어졌다.
‘엄마는 힘들지만, 아기는 엄마가 힘든 것의 백 배가 힘들다고 했었지.’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아기에게 네가 준비되면 신호를 달라고 말하고 기다렸다. 병원은 내가 준비해 간 출산 공, 마음이 편해지는 음악, 아기에게 쓴 편지와 뱃속 사진을 벽에 붙여두는 것을 당연히 하도록 해주었고, 무엇보다 누워서 심음장치를 붙인 채 통증을 견디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껏 운동하며 간헐적인 통증을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싸르르 평소보다 심한 생리통 처럼 통증이 파도치며 다가왔다. 진통이 오면 크게 호흡하며 숨참기를 하는 것은 통증을 감통할 수 있는 방법이었고, 배운 그대로 실시했다. 다시 휴지기가 와서 편안해지면 편안한 음악을 들으며, 뱃속 아기에게 ‘힘들지?~조금만 우리 더 힘내자!~’응원을 보내기도 했다. 진통은 허리로 많이 느껴져서 진통이 올 때는 남편이 미리 배워둔 허리 마사지를 해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아기의 신호가 강하게 온 후 드디어 입수, 수중분만을 시도하게 되었다. 아기는 늘 꿈을 꾼대로 조용하고 평화롭게 자궁속 물에서 그와 비슷한 온도의 물로 편안하게 나와 세상과 만났다. 탯줄이 그대로 달린 채로 나의 가슴에 안겨 심장소리를 들으며 첫 인사를 나누었다. 아빠도 첫 인사를 건네고, 이어 출산을 도와주신 의사선생님의 축복의 기도가 있었는데,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나의 존재, 여성으로서의 나, 주체적인 내가 선택하고 준비한 행복한 출산, 이 경험이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하다. 이 후의 삶이 이어져 어느덧 오십대의 내가 되었다. 그동안 나는 생활 속 파도를 넘으며 점점 더 작은 존재가 되어있다. 소심하며 자신감 없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침 페미니즘의 경험 글쓰기를 할 기회를 만나게 되어 나의 행복한 출산 경험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잊고 있던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강한 나, 강한 여성, 강한 엄마였던 나를 다시 만난 것이다. 앞으로 살아가며 세상 속에서 내가 작게 느껴질 때는 이 소중한 기억을 떠올리며 용기있게 일어서는 나로 살아가고싶다.
■ 권성혜 – 페미니스트로 가는 길목에서
여자로서 내 삶의 주체자로 삶의 방향을 결정하거나 살지 않았다. 모든 과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결혼 적령기가 되었으니 결혼했고, ‘순종이 미덕’이라 믿고 그런 며느리가 살았고, 갈등을 만들지 않아야 하는 현명한 아내로 삶을 살았다. 심지어는 결혼 전에 딸이라 어떤 불평등을 못 느끼게 키우던 친정 부모님도 출가외인이라는 이름으로 아들들과 달리 철저하게 무관심을 보였다. 그 또한 서운함보다 당연하게 믿고 받아들였다.
그렇게 어떤 의심도 없이 당연하다고 믿는 결혼 생활은 뭔가 빠진 삶 같았다. 시댁 대소사에 열심히 봉사하고 나라는 사람의 생각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남편의 월급으로 돈을 쓰고, 모으는 방법도 시어머니의 조언이라는 통제 안에서 이루어졌다. 내 결혼식 사진을 찾아와서 시동생이나 시누까지 다 모여 웃으며 보는 순간에도 난 혼자 설거지를 했다. 내 결혼식 사진인데 나는 못 보고 부엌에 있다는 사실도 며느리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40대 후반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데 행복하거나 편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마음이 답답하고 갑갑했다. 그런 내가 이상했다. 왜, 무엇이 이리 힘들다는 말인가? 내가 이상했고, 나를 이해하기 싶었다. 남편과 관계도 뭔가 잘못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하고 알고 싶어서 심리학에 기웃하기 시작했다. 상록 경찰서에서 운영하는 심리학 과정에 등록하고 공부를 했다. 그곳에서 만난 선생님들이 진행하는 각각의 종류별 심리 공부를 했고, 대학원 진학을 위한 스터디도 했다. 그렇게 3,4년을 심리학 빠지고, 나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뭔지 퍼즐이 잘 맞춰지지 않았다. 조각이 빠진 기분이었다.
2017년도에 마을에서 페미니즘 책읽기 모임을 시작하고, 울림에서 페미니즘 이론 강좌를 들었다. 마을에서 함께 읽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나를 답답하게 옥죄고 있었던 것이 가부장적 언어와 사고라는 걸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스터디와 사람들을 통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인식하고, 나를 힘들게 했던 내 속에 뿌리내린 가부장적인 사고를 들여다보았다.
세상 처음부터 만들어진 신념이나 가치는 없다. 내 것으로 믿었던 것들도 부모가 교육이, 사회가 나를 만들고 형성한 것이다. 따라서 여자라는 이유로 행하는 모든 것은 당연하지 않다. 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많은 가치관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으로 착각했을 뿐이다.
나를 답답하게 느끼고 부당하게 만든 성불평등적인 것들을 하나씩 짚어보고 알아가는 중이다.그래서 아직은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 하고 있다. 여전히 벗지 못 한 가부장적 사고와 튀어나오는 언어, 행동이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그걸 알아차리며 가는 중이다. 그 길 위에서 노력하고 있다.
■ 성희영 – 나의 페미니즘 문턱까지의 경험
페미니즘까지는 아니지만 나의 첫 페미니즘의 감각이 열리기 시작한 게 대학4학년 때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학생운동 시기, 학내 정치조직에서 활동하던 나는, 조직내 남자 선배들이 내놓는 계획과 정세인식에 대해 공부하고 활동계획을 짜고 실행하는 후배였다. 4학년이 되었지만 학교엔 여전히 선배들이 남아있었고(군대에서 돌아온 선배들이었거나 대의(?)를 위해 군대를 미룬 선배들이었다) 그들은 미리 말을 맞춰오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로 서로 의견이 잘 맞는 편이었고 후배들은 그 의견에 동의하게 되는(잘 알지 못했고 생각할 시간도 많지 않았다. 후에 그것이 정보의 독점이었다는 걸, 그것이 권력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상황이었다. 어쨌든, 그런 방식의 운동이 계속 되다가 어느 날, 조직 회의에 너무 가기 싫었다. 선배들이 결정해 오는 것도 싫었고 그런 문화도 싫었다.
특히, 대자보는 언제가 여성후배가 쓰는게 당연시 되고 총학생회장 후보는 남성인 것이 암묵적으로 동의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 있었다. 그 당시엔 싫은 이유가 정확히 해석되지 않았는데, 이후에 페미니즘 공부를 하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운동사회에서도 가부장성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젠더규범적 사회의 연장선이었다는 것을. 그렇게 외쳤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반대를 위한, 다른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새로운 시도들도 그 기저에는 가부장성이 있었다는 것을.
나의 페미니즘의 시작은, 나중에서야 설명된 대학 4학년 운동의 경험에서 시작된 거라고 생각하며 앞으로 계속 이어질 나의 페미니즘을 기대해 본다.
■ 조창아
저는 ‘거룩한 글쓰기’라는 매일 글쓰는 모임을 4년째 운영 중이에요.
여성대회를 맞아 ‘페미니즘과 만난 여성의 삶 수기’ 쓰기 이벤트를 계기로 저도 써 봤어요.^^
[나는 여성이다. 나는 이혼인이다. 나는 페미니스트이다. 나는 평화주의자이다.]
함께크는여성 울림에서 페미니즘 강사 과정도 수료하고 활동도 열심히 해 왔지만,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고 실천하는 김화숙 작가와 3년째 페미니즘 토론팀에서 함께했지만,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내 안에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엄청난 기준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상을 다 알아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누가 물어보면 유창하게 페미니즘을 설명하고 현실을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던 것이다.
그런데 울림에서 이벤트로 진행한 ‘페미니즘과 만난 여성의 삶’ 쓰기 덕분에 글을 쓰면서 나는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밝혔다. 그러기까지 많이 돌아왔다.
2월초에 울림 대표를 맡은 뒤, 한 달 동안 나는 어중간한 위치에서, 어중간한 의식으로 서 있었다. 몹시 불편했다. 나 같은 사람이 울림 대표를 맡는 게 맞나? 울림 얼굴에 먹칠하면 안되는데… 전 대표인 김혜정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나로서는 그 마음이 더했다. 나는 너무 준비된 게 없는 사람인데…
그런데 ‘역할’을 맡고 나서 한 달이 지난 지금 내 안에서 차오르는 솔직한 말로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글을 쓰기에 이르렀다.
울림 대표를 맡고 나서 내가 나를 믿고 나를 대표로 추대한 사람들을 믿고 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고 깨달았고 이번에 ‘페미니즘과 만난’ 글을 쓰다 보니까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내 안에 숨어있고 쌓여 있던 의식이 드디어 빛을 본 것이라 믿는다.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기까지 멀리 온 길을 돌이켜 보니, 나는 여성인데 여성이다라고 말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페미니스트가 별것인가?
이름만 거창할 뿐, 여성을 포함한 성별에 대한 평등을 지향하면, 또는 활동을 하면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무언가. 적어도 성차별주의자는 아니니까 말이다.
태극기를 극우집단에게 빼앗겼듯, 페미니즘 또한 극단적인 여성 폭력집단에게 빼앗겼고, 페미니즘을 적대시하는 언론의 갈라치기에 빼앗겨 왔다. 주위에서 여성들이 ‘나는 페미니즘에 거부감이 있어’라는 말을 하는 경우를 보라.
나 역시 ‘브런치’에 글을 써 온 4년 동안 내가 페미니스트이고 세월호 연대 활동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는 말을 자신있게 한 적이 없다.
세월호 얘기를 쓴 날은 며칠 동안 잠을 편히 못 잤다. 독자들이 싫어하면 어떡하지? 구독을 취소하면 어떡하지?
왜 그랬나? 내가 할 말을 하지 못하는 건 가부장제가 나에게 요구한 행동이었다. 점잖은 사람, 성숙한 사람, 말을 아끼는 사람 등으로 포장하게 하며.
탄핵 집회의 문화가 바뀐 것 중 하나가 ‘짱’을 맡지 않은 일반인들이 발언하기 시작했고 하나같이 정체성을 밝힌다는 것이다. 게이, 레즈비언, 퀴어라는 말로 자신을 소개하며 자신이 왜 그 자리에까지 올라왔는지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친구들에게 고백하듯이.
권위와 포장을 벗어던진 솔직함에 각 단체 대표라고 나온 발언자들보다 더 큰 박수를 받는다. 그 자리에 함께하면 뭉클할 때가 많다. 모든 벽이 허물어질 거라는 기대와 희망이 서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귀감이 될 것 같으니, 아이들을 데리고 꼭 한 번 참여하기 바란다.)
또 하나의 계기는, 내란이라는 핵폭풍 속에서 탄핵집회에 매주 참가하면서, 2030들이 솔직하게 정체성을 밝히는 자세를 보면서, 울림 대표까지 맡은 것이 나의 페미니즘 의식을 고취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면에서 나는 나의 정체성을 이렇게 밝히고 싶다.
“나는 여성이고, 이혼인이고, 페미니스트이며, 평화주의자입니다.
나는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는 가치에 동의하고, 그와 반대되는 주장이나 제도에 맞서 싸울 것입니다. 제일 앞에는 못 서도 함께 가는 길에 동행할 수는 있습니다. 쪽수 채우는 일이 얼마나 대단한 건데요! 그것이야말로 들풀이자 민중의 힘, 대한민국에 민주주의를 정착하게 한 힘이라고 믿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