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세계 여성의 날 온라인 이벤트_페미니즘을 만난 경험 쓰기 (2026. 2. 23. – 3. 6.)
- 주제 : 페미니즘을 만난 경험 쓰기
- 기간 : 2026년 2월 23일 (목) ~ 3월 6일 (금)
- 참가자: 총 11명
- 시상 :
<페미니즘을 만난 경험쓰기> 단톡방 업로드 순
_심박
때는 바야흐로 1994년, 나는 친구들과 안양에서 여성단체를 만들기 위한 준비모임을 하고 있었다. 페미니즘의 ‘ㅍ’도 모르던 내가 친구의 권유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것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여자들끼리 회의를 하고 그 결과를 현실화하는 과정이 그랬고 집단상담을 통해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그랬다. 당시는 여성주의라는 이름으로 집단상담 프로그램을 많이 진행했는데 개인의 고민이 가부장 사회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주고자 했고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 역할을 하면서 지지와 위안을 주고자 했다. 그렇다고 무조건적 지지만 했던 것은 아니다. 진정한 ‘거울’ 역할은 요즘말로 ‘메타인지’를 할 수 있도록 돕는건데 때론 엄중했다.
나는 집단프로그램에서 남편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었다. 나는 내 잘못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모든 문제의 근원은 남편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집단 프로그램을 통해 나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을 때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것은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었다.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확신의 밑바닥에 깔린 내 문제가 건드려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한참 뒤에나 인식할 수 있었다.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여성단체 활동을 하고 있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왜 여성단체 활동을 하고 있을까? 생각해봤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직도 그 충격이 소화가 안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해소될 때까지 범주를 못 벗어나고 있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_ 문장혜<페미니즘을 만난 경험>
페미니즘을 만난 경험이라면, 먼저 2025년 여성의 날이 생각난다.
58세에 나는 처음으로 울림이라는 여성단체에 가입했고, 회원들과 함께 여성의 날 행사에 참여했다.
안산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전철에서 여러 분의 회원들과 만났다. 생전 처음 참여하는 여성의 날 행사였지만 여럿이 함께하니 어색하지 않았다.
광장에는 윤석열 탄핵을 앞두고 촉구하는 많은 시민들이 모였고, 그 가운데 여성의 날 행사는 보라색 빛깔로 더욱 연대가 돗보였다. 내가 보라색 바지를 입고 그들 속에 함께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전과 다른 세상에 나는 앉아 있었고, 새로이 눈을 뜨는 시간이었다.
어려운 정국이었지만 우리는 노래하고 춤추고 서로를 격려했다. 연대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했다. 광화문에서 종각까지 행진을 하고 뒤풀이에 갔다. 그때 화숙 작가님이 페미니스트는 차별이 없는 세상을 원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페미니스트라는 낯선 용어가 친숙하게 느껴졌다.
성평등한 세상. 차별이 없는 세상. 다양하고 공평하고 포용적인 세상.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세상. 바로 내가 꿈꾸는 세상이 아닌가?
이후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거침없이 한다. 남학생들이 학교 선생님이 여학생만 위한다고 페미니스트 같다고 욕처럼 말해서, 나도 페미니스트야 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차별을 싫어하는 사람이거든. 여학생, 남학생 차별하지 않는 선생님이 페미니스트인거야.”
나는 아직 부족하지만 울림을 통해 많은 것을 듣고 읽고 배우며,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햇병아리 페미니스트이다.
_ 한순화 <제목: 새벽을 읽다>
2019년 말부터 2022년 말, 코로나가 아우성 치던 그 시기를 잃어버린3년 이라들 말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 얻은 것들도 분명 있다. 자연스럽게 찾아온 비대면 문화속에 깊숙히 스며들었던 zoom활동도 그 하나다. 학교수업, 회의, 모임 뿐 아니라 재택근무까지 활성화되면서 zoom의 역할은 크게 한 몫 하게 된다.
어느 순간 간편한 앱이 만들어지고 휴대폰 하나면 장소불문 이동 중에도 모든게 가능해졌다. 처음 어색하고 익숙치 않아 많은 애피소드를 창출하기도 했던 zoom활동이 이제는 너무나 익숙하게 나의 삶 속에 자리하고 있다.
울림에는 많은 소모임이 있다. 그 중 하나인 ‘페미니zoom’은 우리가 선정한 책을 zoom에서 만나 윤독하는 모임이다. 그 시작을 가져다 준 것 또한 코로나다. zoom문화가 활성화 되면서 책꽂이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책들을 저녁시간 zoom이라는 공간에 들어와 같이 읽어가면 좋겠다는 의견이 모아진 그녀들과 거침없이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각자의 미뤄 둔 몇 권의 책들을 읽는과정에 저녁시간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아침 6시로 변경하면서 이 번 기회에 울림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페미니즘도서 읽기로 가기로 하였다. 이 후 참여하는 회원들도 많이 늘어나고 각자 추천에 의해 읽을 도서 목록이 작성되어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책zoom 은 ‘페미니 zoom’으로 바뀌었고 내겐 하루를 여는 일과로 자리매김 되었다. 06시, zoom에 들어온 순서대로 일정 분량씩 돌아가며 윤독하다 07시 마치는 알람 소리와 함께 zoom나가기를 한다.
이런책을 읽었다고?
말하는 몸 1.2,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밤의 팔레트, 작은 것들의 신, 감정의 문화정치, 관통당한 몸, 직업을 때려치운 여자들, 짐을 끄는 짐승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셀테러, 디지털시대의 페미니즘, 규방의 미친 여자들, 소녀들의 심리학, 육식의 성정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혐오와 수치심, 성정치학, 젠더와 사회, 가녀장의 시대, 시스터 아웃사이더, 페미니즘-교차하는 관점들, 완경선언, 보이지 않는 여자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창조 ,담대한 목소리…..
지금은 정지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를 읽고 있다.
나열해 본 책 제목들에서 알 수 있듯이 내겐 너무나 어려운 책들이었다. 선정된 책들을 겁없이 시작은 했지만 제목만으로 책 내용을 판단할 수 없기에 읽다보면 어렵기도 하고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부분들도 많았다. 가끔은 눈을 감은 채 상대가 읽어주는 목소리에 졸면서 듣기만 한 적도 많았다. 책은 간혹 구입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도서관 대출을 이용한다. 사실 책 제목 때문에 대출시 살짝 주춤 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코로나 이 후 내 하루의 시작을 여는 페미니zoom 책읽기는 내게 페미니즘이란 단어와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조금은 익숙해지게 하였고 분명 내 삶 속으로 살며시 스며들고 있음을 느낀다.
_황선희
3.8 여성대회를 앞두고, 과정을 돌아보게 되었다.
함께크는여성울림을 처음 만났을 때, 소모임 중 ‘아나페(야, 나도 페미니스트야)에 이상하게 마음이 갔다. 누군가가 끌어당기거나 떠민 것도 아니고, 대단한 결심이 있었던 건 더더욱 아니다. 그냥 끌렸다.(그즈음 모두를 위한 포괄적 성교육을 받고 지역아동센터에서 강의를 했고, 페미니줌 윤독도 했다.)
그때의 나는 어린이도서연구회 활동 안에서 그림책을 통해 아이들과 만나고 있었고, 그 가장 부드러운 도구로 여성의 삶과 돌봄, 관계, 차별의 장면 들을 읽으며 질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는 내 안에 없었다.
여성의 몫인 돌봄, 예쁘고 착해야하는 여아… 당연한 듯 받아들인 것들에 뭔가를 느꼈다고 해도 설명할 언어를 갖지 못한 나는 ‘저 페미니스트에요’라는 말에 질문이나 설명 요구가 따라올까봐 아직 준비되지 않은, 말하지 않는 사람을 택했다.
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페미니즘’이란 단어는 설명하기 위한 무기처럼이 아니라, 세상을 바로 보고 이해하기 위한 렌즈처럼 내게 다가왔다.
아직 배우는 과정이고, 누군가의 말과 경험 덕분에 생각이 확장되어가고 있는 나의 페미니즘은, 깨어있으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단어를 고르고 질문을 가까이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_손정숙
여성으로서 나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89년, 콜레트 다울링이 쓴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책을 읽었다. 여성들은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독립적인 주체가 되기를 희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데렐라처럼 그들의 인생을 바꾸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데 이런 이중적 심리상태를 작가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라고 말했다. 작가의 지적에 나는 뜨끔했다. 내 안에도 그런 갈등심리가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의존성을 탈피하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기에 나는 자책하곤 했다.
그 즈음 난 신문에 난 취업광고를 매일 들여다보며 일자리를 찾았다. 이런저런 일을 하며 취업에 도전하다가 걸려든 것이 9급 공채 공무원이었다. 세무직이라서인지 기존 직원들은 거의 남성들이었지만 입사 동기들 중에는 여성들도 다수 있었다. 업무에서 여자 동기들은 주로 문서수발과 커피 타기 등 허드렛일이 주어지고 남자 동기들은 조직의 고유업무인 부과징수 업무가 주어졌다.
내가 앉은 책상은 사무실의 입구에 배치되어 방문자들을 직원에게 안내하는 일이 맡겨진 적도 있다. 같이 입사한 남직원들은 선배들에게 일을 배우며 능숙한 일꾼이 되어가고 있는데 나는 굳이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소한 일을 날마다 하고 있다는 데서 자괴감이 들었다. 시시한 일만 하고 있는 내가 하찮게 느껴져 열등감도 느꼈다.
직장생활 초기 어떤 과장은 내게 담배심부름을 시키기도 했고 어떤 과장은 개인적인 은행 업무를 시키기도 했다. 내가 느낀 모멸감과 불만을 드러내고 싶었지만 방법을 찾을 수 없었고 성차별 관행은 공기처럼 당연시되었다.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스스로의 의식개혁으로 일정 부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견고한 사회적 억압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용감했던 여자 선배가 생각난다. 1997년 즈음, 3년마다 실시되던 인사이동 후 고참 선배가 하던 일을 내가 맡게 되었다. 새로 부임한 관서장은 직원들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아침마다 전 직원을 모이게 한 후 직원들이 돌아가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준비하여 앞에 나가 발표하도록 했다. 나의 전임자인 그 여자 선배의 차례가 되자 그녀는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어나갔다. 그녀는 19년 동안 일을 해왔는데 지금껏 문서수발과 차 심부름 그리고 책상 닦기 등 허드렛일만 했다고 토로했다. 원고를 읽어나가는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더니 급기야 눈물로 터졌다.
그녀의 눈물에 나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내게 조직의 고유업무도 배워야 한다며 과장에게 일할 권리를 요구하자고 했다.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나는 부과징수업무를 달라고 과장에게 말했다. 술을 두어 잔 마시고 용기를 내어 당당하게 말을 했다. 의외로 쉽게 과장은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였고 우리는 원하던 업무를 하며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점차 입사하는 여직원 비율이 높아지면서 남녀 불문하고 고유업무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직장에서의 성차별은 희미해졌으나 결혼으로 꾸린 가정에서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다. 남편은 같이 직장생활을 했는데 아이들을 돌보며 집안일을 하는 것은 주로 내게 맡겨졌다. 직장생활과 육아와 가사노동을 동시에 해내야 하는 생활은 버겁고 불평등하고 힘겨웠다. 남편은 평범한 한국남성들처럼 가부장적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이중노동으로 인한 고통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나는 내가 가진 억안울함을 해결하기 위해 <빨래하는 페미니즘>등 관련 책을 읽으며 나의 외로움이 구조적인 것임을 확인했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페미니즘의 구호는 내가 느끼는 고통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주었다. 현실에서 느꼈던 불평등이 책 속에서 정리되자 내 안에서 고슴도치의 가시가 돋아났다. 여성억압의 구조에 무감각한 주변 사람들과 남편을 날카롭게 찔러봤지만 그럴수록 관계는 더 나빠졌다.
뾰족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힘겨워서 한동안 페미니즘을 멀리했다.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문제를 덮어두고 바둥거리며 이중노동을 감당했다. 남편의 조상만 기리는 제사노동에도 묵묵히 참여했다. 페미니즘은 그러나 그만둔다고 그만둘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 구석구석에 차별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공감하기 어려운 상황을 페미니즘 시각으로 들여다보면 명쾌해지기도 한다.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진다’는 시몬느 드 보봐르의 명제를 만나면서 신데렐라 콤플렉스로 자책하던 스스로를 토닥일 수 있게 되었다. 내 안에서 여성성으로 작동하고 있는 수동성과 의존성은 가부장제가 심어놓은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페미니즘 책을 다시 펼쳐 들었다. ‘야나페’와 ‘찐빵장미’에 참여하며 토론을 하고 여성주의 상담 스터디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페미니즘은 단지 성차별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한 방식을 모색하는 공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 더 조화로운 존재가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는다.
결혼 이후 줄곧 명절날 차례 의식을 두고 줄다리기가 있었다. 이제 남편은 제사도 차례도 그만하자고 한다. 명절증후군은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되고 아이들에게 불평등한 제사문화를 대물림하지 않아도 된다. 페미니즘이라는 렌즈를 버리지 않으면 더 자유롭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변화의 발걸음이 달팽이처럼 느리더라도.
_홍연아 <제목: 페미니즘을 만난 날>
초등학교 4학년 초, 남성이었던 담임 선생님은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속담을 말했다. 불쾌헸고, 지금은 너무 후회되는, 당시의 내 선택은 ‘과묵하기’였다.
남학생은 기술을, 여학생은 가정.가사를 배우던, 남학생 반장, 여학생 부반장이 당연하던 시기였으니 말 다 했다.
여자는 수학을 못하고, 물리도 싫어한단 규정이 싫어서 수학을 더 열심히, 선택과목도 물리를 선택했다.
사회가 규정한 여성성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 규정 자체를 거부하지 못하고 ‘나는 그렇지 않아’를 열심히 증명하려 했던, 페미니즘과의 어설픈 첫 만남이었다.
_최운경
여전히 당당하게 페미니스트라 말하지 못하는 건 내가 가부장제 라는 속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렇다.
세 딸 앞에서 얼마나 괜찮은 여성으로 살고 있는가, 를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 대해서도 부끄러운 부분이 훨씬 많기에 당당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내가 만난 페미니즘이 어디서 부터인가 생각해보면,
그 처음은 중학교 국어선생님이었던 큰이모다. 이모의 끊임없는 내게 했던 말들. 공부해야 한다. 대학가라, 직업을 갖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말을 하고 글을 써야 한다는 말씀. 이모는 39세에 암으로 세상을 일찍 떴다.
대학2학년 때, 사회복지학과에 다니는 친구가 내게 본인 과의 과목 하나를 청강하라 권유했다. 동녘 출판사에서 나온 연보라색 표지의 <여성학 강의>가 내가 읽은, 만난 첫 여성학 이론서였던 것 같다.
그 교수님의 카랑카랑, 똑 부러졌던, 여학생을 향해 자기 목소리를 가질 것을 요구하며 토론을 붙이던 그 수업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졸업 후 잠시 전공과 무관한 일을 했다. 제복을 입고 근무하는 곳이었고, 여직원이 엄청 많은 곳이었는데, 사무직, 고위직엔 온통 남성이었던 아주 불합리한 직장조직에 살짝 균열을 내었다.
어린 여직원들에게 모임을 만들어 책을 읽자고 했고, 자연스레 토론이 이어졌고, 커피타는 일을 자판기로 바꿔보자는 의견이 나와서 사장실에 건의했다. 다행히 기획총괄 이사님은 나이든 분이었는데도 그 선에서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여졌다. 여성직원이 일하다가도 손님이 오면 커피타는 일은 그만하게 되었다. 남성직원 손님이 대부분이었고, 커피는 각자해결하는 하는 것으로. 95년의 일이다. 30년 전의 일인데 참 조직문화 바꾸는 일은 예나지금이나 쉽지 않다. 동료 남성직원들의 반발과 조롱섞인 말들이 여직원들의 마음을 많이 다치게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안 그러겠지?
오래 잊고 살았다. 페미니즘.
5년전 단원FM을 시작하면서 정혜실 본부장님을 그 전부터 알고는 지냈지만, 좀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면서 당당하게 나는 페미니스트다,고 소개하는 모습에 좀 놀랐었다.
나는 그리하지 못한다.
그만큼의 당당함도 없고, 실천도 없고, 그 많은 이론들을 알지도 못하고, 어렵기도 하고, 집안 내 문제도 해결 못하는 내가 무슨?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미디어리터러시 연구모임을 하면서 우리 미디어에서 구현되는 성차별에 대해 좀더 학습하게 되었고, 무심코 지나가던 많은 일들에 자꾸 걸리는 게 많아졌다.
페미니즘은 평등운동이구나, 여성만이 아닌 다같이 행복하자는 운동이구나, 비장애인과 장애인, 이주민과 선주민 모두가 평화롭자는 운동이구나,를 서서히 스며들듯 배우고 알아가는 중이다.
나는 여전히 그 방향을 향해 매일 조금씩 걸어가는 중이다. 대단한 혁명가는 못되고 내 딸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억울함이 없기를, 자기가 가진 고유함으로 차별받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오늘을 산다.
나 또한 남은 생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기에 우리가 사는 사회가 좀더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몸을 살짝 기울여본다.
_권성혜
40대 후반에 나는 나를 이해하고 싶고, 궁금했다. 나를 포함한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같은 일을 왜 다르게 인식하고, 반응하는지 알고 싶었다. 더 큰 궁금한 것은 행복해지고 싶은데 뭔지 나의 행복을 막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심리를 알면 해결될 것 같아서 심리학을 공부했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각자가 가진 기질도 중요하고, 과거의 경험으로 지금을 해석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면서 삶의 많은 부분이 이해되었다. 그러나 심리학은 ‘왜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는 설명해 주었지만, ‘왜 어떤 역할은 나에게만 주어지는지’까지는 답해주지 못했다.
뭔가 한 조각이 빠진 느낌이었다. 시집갔으니 출가외인으로 시댁이 먼저라는 친정아버지도 이해되고, 며느리로서 집안 대소사에 한 마디 의견도 낼 수는 없지만 일은 다 해야 한다는 시댁이라는 시스템도 이해되었다. 남편은 여자 하기 나름이니 남편과 갈등이 생기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내 부덕 탓 같았다.
이해는 되지만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은 보이지 않았다. 남편과 똑같이 일하고 귀가해도 집안일이 밀리거나 반찬이 없으면 미안한 생각이 드는 걸까? 시어머니는 명절에 와서 창문틀에 먼지를 닦으면서 여자가 돈 번다고 집안을 소홀하면 안 된다고 혀를 차시는 걸까? 여전히 내게 주어진 역할에 대한 명확한 답이 보이지 않았다.
2017년 동네에서 페미니즘 책을 읽고 같이 이야기하자는 도서 모임이 생겼다. 첫 책이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였다. 개인의 성격 문제라고 여겼던 불편함들이 구조와 역할의 문제일 수 있다는 관점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정기적인 독서와 토론을 통해서 퍼즐 한 조각을 찾았다. 나를 억울하게 만들고, ‘나다움’을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났다. 모임을 통해 울림에서 하는 강의 정보도 알게 되면서 울림과 만남도 시작되었다.
한참을 돌아왔고, 여전히 페미 이론을 잘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가부장적인 행동과 언어를 쓰고 있지만 나를 이해하고, 지금의 세상을 이해하는 열쇠 중 하나인 페미니즘은 그렇게 내게 왔다.
_엘리숙경
아직도 저는 손님이 오면 차를 타줘야 하나 하고 상반신이 자동으로 세워집니다.
미스리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드는 매 순간,
나보다 어른이니까,
일을 위한 예의 차원,
일터에 누가 되면 안되니깐,
내 형제, 지인이라면 당연 그랬을 테니까 등등의 이유로
상반신에 이어 의자에서 발딱 일어납니다ᆢ
뿌리 박혀있다 못해 인이 박혀있는 기타 등등의 저의 불평등세상에서 나가는 건 ‘나’일텐데,
먹고 살아야 한다는 핑계가 가득해서 옴짝달싹을 못하고ᆢ
여기에서나마 늘 눈팅으로 마음의 기를 펴 보곤하네요ᆢ
이 아침 여기 계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_담담
나는 24년 간 결혼 생활을 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자주 의문을 가졌다. 자유 민주주의 현대 사회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이렇게 억압을 받으며 살 수가 있을까. 이 억압은 죽어서야 끝나겠지. 그러나 나는 교회의 도움을 받아 이혼할 수 있었다. 결혼 생활의 불행은 여자를 남자의 종속물로 여기는 가부장이라는 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나는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삶을 통해 절실하게 깨달은 셈이지만 그때까지 페미니즘이란 용어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40년이 넘는 기간 신앙 생활을 했다. 그 기간 나는 나의 인생의 주도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수동적으로 살았다. 그게 문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끔 이전에 같이 교회를 다니던 사람을 우연히 길에서 마주치면 아직도 그 교회를 다니냐며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마다 그 사람이 빗나간 인생을 살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교회의 사역자가 교회를 떠났고 교회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 사건 후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여러 의문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어느날 친구와 만났을 때 결혼을 교회 지도자의 말에 따라 결정했다는 내 말에 친구는 너는 어떻게 너의 인생에 대해 그토록 무책임할 수가 있냐고 했다. 내 인생이 내 것이고 내가 책임지는 것이라고? 나는 대체 어떻게 산 것이란 말인가.
이혼과 교회가 해체되는 경험이 단순히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자유와 주체성에 대한 각성으로 이어지는 일은 교회에 새로운 목회자가 오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목회자는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이고 그 짝꿍은 폐미니스트 작가였다. 그 목회자는 자기의 지위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설교를 거침없이 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었으므로 사람이 사람을 통제하거나 사람이 사람의 지배를 받거나 하는 것은 기독교 정신이 아니라고. 그 짝꿍은 교회에 페미니즘 영화나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페미니즘에 기초한 설교나 모임은 나에게 생길 수밖에 없었던 일들에 대해 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나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랜 시간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사실 나는 아직 페미니즘을 제대로 만났다고 할 수 없다. 아직 잘 모른다. 조금씩 탐색하며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다.
꽤 오랫동안 나를 보아온 지인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전에는 내가 무슨 막 같은 것에 갇혀 있는 사람 같이 답답했다고. 그런데 요즘은 마치 그 막을 찢고 나온 사람 같이 역동적이고 밝다고. 아마 그것은 페미니즘이 나에게 준 선물이 아닌가 한다.
_유정화
‘울림’이라는 단체를 통해 페미니즘이라는 세 글자를 처음 마주했을 때, 그저 낯선 단어 중 하나였던 그것이 내 삶에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나는 비로소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되었습니다.
“엄마, 페미니즘이 뭐야?”
아이들이 어릴 적 내게 물었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습니다.
“페미니즘은 모든 이들의 평등을 말하는 거야.”
하지만 고백하자면, 당시의 나는 그 말처럼 평등하고 유연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보수적인 사람이었고, 아이들에게는 누구보다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엄마였습니다. 내 생각의 틀 안에 아이들을 가두려 했던, 조금은 폐쇄적인 사람이었지요.
지식이 아닌 ‘삶’으로 배운 변화
나의 변화는 수많은 책을 읽거나 이론을 완벽히 공부해서 찾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페미니즘이라는 가치를 내 삶의 태도로 받아들이면서, 나의 주변 환경과 과거의 경험, 그리고 현재의 생각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알아챘습니다. 딱딱했던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고, 타인의 아픔과 내 안의 모순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페미니즘은 나에게 단순히 ‘여성 권익’을 넘어, ‘인간을 인간답게 대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더 다정한 어른으로 가는 길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보다 많이 성장했습니다. 권위로 누르기보다 대화로 다가가려 노력하고, 닫힌 마음보다는 열린 시선으로 세상을 봅니다. 이 변화가 나는 참 뿌듯합니다.
나는 이제 ‘좀 더 다정한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습니다. 페미니즘을 알고 받아들인 시간은, 내가 진정한 의미의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나를 긍정하고 타인을 존중할 줄 아는 지금의 내 모습이 참 좋습니다.
_짱아 <제목: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결혼 30년 생활 끝에 느닷없이 싱글이 되었다. 하나 있는 아들은 일찌감치 독립해서 나 혼자 남으니 나를 위해 돈 벌고 애쓰는 삶이 의미가 없게 느껴졌다. 하루하루가 짙은 회색빛이었다.
그때 ‘울림’이 내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외로움에 떨며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날마다 나쁜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울림의 다양한 행사에 참여하며 ‘함께’라는 가치를 몸으로 느꼈다. 글쓰기 합평 모임 ‘수글수글’에 참여하며 여성으로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감각을 익혀가며 페미니즘에 조금씩 눈을 떴다.
세월호 공부모임 ‘별을 품은 사람들(별품사)’에 합류한 것은 내가 싱글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세월호만 생각해도 무겁고 아파서 멀리하려고 했던 내가, 유가족을 만나고 그들과 연대하는 등의 실천을 할 자신이 없던 내가, 별품사 친구들과 함께 사회적 참사에 관한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416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없던 용기가 어디서부터 나온 걸까.
가족을 잃고 혼자만 남았다는 고립감과 외로움이 없었다면 남에게 시선을 돌리지 못했을 것이다. 나 혼자만 불행하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당당히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장 큰 각성이 일어난 것은 내란 시기였다. 나의 무관심이 대한민국의 비극을 빚었다는 뼈아픈 반성을 하였다.
우리 사회를 여성, 노인,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가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세상, 모두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존중하지 못하는 불행한 세상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나는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이슈까지, 너무 착하게 순응했을 뿐 아니라 나 한 사람에 의해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패배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내란시기에 집회에 매주 참여하여 각계 각층의 발언을 들으며 우리 사회가 도대체 어디까지 썩어 있는지, 내가 아는 세계는 얼마나 좁은지, 그 세계를 바꾸는 데 나는 무얼 했는지 많은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덜컥 울림 대표까지 맡게 되었다. 페미니스트라고 당당히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울림의 대표라니! 내가 울림에 작은 손을 보태는 것이 시작이라고 느꼈다.
우리 사회의 모두가 조금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차별이라도 반대하고 싸울 각오를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페미니즘 정신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게 나는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민지샘~ 넘 멋있어요~ 정말 수고많으셨습니다. ♥♥